1. 떡메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마을을 깨우는 북이었다
예전에는 중요한 날마다 떡을 쳤다.
설날, 백일, 돌잔치, 제사, 결혼, 입학…
모든 시작과 기념엔 언제나 찰진 떡이 있었고,
그 떡을 완성하는 마지막 순간엔 ‘떡메’가 있었다.
떡메치는 소리는 단순한 작업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 집에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고,
그걸 다루는 장인은 마을의 중심에서 ‘기쁨의 박자’를 짜내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어린아이들은 그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며 웃었다.
떡메 장인은 소리를 치는 게 아니라,
삶의 기운을 두드리는 기술자였다.
2. 떡메치기는 단순한 힘이 아니라 정교한 리듬이었다
떡메를 든다고 누구나 떡을 잘 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쪄낸 찰떡을 메 위에 올리고,
적당한 온도와 점도가 유지될 때
정확한 타이밍과 일정한 힘으로 메를 내리쳐야만
찰기 있고 쫀득한 떡이 만들어진다.
떡메 장인은 메를 내리치는 손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떡의 반죽 상태, 증기량, 반발력, 찰기의 정도를 몸으로 느끼며 박자를 조절한다.
두 명 이상이 교대로 메를 칠 때는
‘착! 탁!’ 소리처럼 일정한 박자와 간격을 유지해야
반죽이 고르게 눌리고 잘 풀린다.
이건 단순한 근육의 반복이 아니라,
떡과 손, 메와 몸이 주고받는 정교한 소통이었다.
3. 떡메 장인은 음식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리듬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장인은 떡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백일 떡을 칠 땐
아기의 건강을 기원하며 더 곱게 내리쳤고,
제사 떡을 칠 땐
조상 앞에 흠 없는 모양을 올리기 위해
각을 살리고 표면을 반들반들하게 다듬었다.
결혼식이나 동네 잔치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엔
박자감 있는 리듬으로 메를 치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 떡메 장인은 요리사이자 연출가였고,
손의 기술자이자 마을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사람들은 떡 맛보다 먼저
그가 내리치는 메의 소리와 손의 리듬을 기억했다.
4. 떡메 장인이 사라지며, 공동체의 박자도 조용해졌다
지금은 대부분 떡집에서 기계로 떡을 만든다.
소리도 없고, 리듬도 없다.
기계는 빠르지만,
그 소리 안엔 사람의 온기와 기쁨의 박자가 없다.
우리가 잊은 건 단순한 떡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 속에 담긴 삶의 축제와 사람의 온도다.
형 블로그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떡메를 다시 치자는 게 아니라,
그 리듬을 만들던 손,
그리고 그 손에 실려온 사람들 간의 온기를 다시 꺼내 보여주는 일이야.
떡은 조용히 식어가도,
그걸 쳤던 소리는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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