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상은 물건보다 ‘사람을 파는 일’이었다
예전 시골 마을 골목에 낯선 이가 나타나면
먼저 귀를 기울였다.
“예에 빗 있어요, 참빗, 날이 고운 새 참빗 나왔어요!”
행상인의 외침은 단지 광고가 아니라,
마을을 깨우는 음악이고, 사람의 관심을 끄는 한 편의 연극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은 작고 소박했지만,
그 물건을 파는 방식은 크고 풍성한 말솜씨로 이루어졌다.
행상인은 말로 웃음을 주고, 말로 신뢰를 만들고, 말로 거래를 성사시키던
말의 기술자이자, 감정의 소매상이었다.
물건이 뛰어나지 않아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정겹고 입담이 좋으면
마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2. 말은 단지 상품 설명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섞은 기술이었다
행상인은 단순히 제품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
그는 말 속에 자기 삶의 일부를 담았다.
“이 빗 하나 들고 평양까지 다녀왔지요. 추웠지만 그만한 건 없었어요.”
“이 바늘, 서울 큰 백화점에서 나오는 거랑 같아요. 근데 나는 싸게 드리지.”
그 말들은 사실일 수도, 조금 과장일 수도 있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고, 흥미를 끌었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말을 잘한다는 건 단순히 유창하다는 게 아니었다.
듣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웃게 하고, 주머니를 열게 만드는 흐름과 감정의 타이밍을 아는 것이었다.
행상인의 말솜씨는 제품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람을 함께 파는 일이었다.
3. 물건보다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말한다.
“그 사람? 아, 그 화장지 팔던 사람 말이지. 말 한마디 참 재밌게 잘했어.”
기억 속에 남는 건,
그가 팔았던 물건이 아니라
그가 했던 농담, 했던 칭찬, 말끝의 억양과 표정이었다.
행상인은 그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동시에 이야기를 뿌리고, 자신의 존재를 남겼다.
가끔은 그가 돌아가고 나서
동네 사람들끼리도 “오늘 그 사람 또 왔다 갔네” 하며
그가 남긴 이야기 조각을 다시 되새기곤 했다.
행상인이 돌아가는 길엔
팔지 못한 물건보다,
사람들과 주고받은 말들로 인해 따뜻해진 기억이 더 많이 남았다.
4. 말의 기술이 사라지자, 장터의 정서도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상품평으로 물건을 고른다.
상인과 고객 사이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잊은 건
그 말이 단지 거래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잇고, 감정을 흐르게 하며,
거래보다 먼저 관계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형 블로그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단순히 ‘예전 상인의 입담이 좋았다’는 말이 아니라,
소통이 사라진 시대에
다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콘텐츠야.
말은 공기 속에 사라지지만,
그 말이 남긴 여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행상인의 하루는 짧았지만,
그가 남긴 말은 긴 기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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