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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는 어떻게 여름을 책임졌을까

1. 얼음이 귀하던 시절, 얼음장수의 등장지금이야 냉장고 문만 열면 시원한 얼음을 꺼낼 수 있지만, 불과 50~60년 전까지만 해도 얼음은 여름철에만 누릴 수 있는 귀한 사치였다. 냉장고가 대중화되기 전, 얼음은 ‘살 수 있는 사람만 살 수 있는 계절의 선물’이었다. 이 시절, 여름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얼음장수였다. 얼음장수는 두꺼운 얼음 덩어리를 가마니나 톱밥으로 싸서 수레나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판매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얼음 나왔어요~” 하고 외치는 소리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곤 했다. 얼음장수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무더운 여름날 사람들에게 시원한 위안을 나누어 주던 존재였다. 어쩌면 그는 여름을 팔고, 시원함을 배달하던 계절의 사자였는지도 모른다.2. 얼음 한 덩어리로 이어지던 가족..

다듬이질하는 아주머니들, 그 소리 속의 정서

1. 집집마다 울려 퍼지던 다듬이 소리예전에는 골목길을 걷다 보면, 집집마다 ‘텅텅, 통통’ 울리는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따뜻하고 묘하게 경쾌해서,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듬이질은 단순히 옷감을 다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날그날의 삶을 정리하는 리듬 있는 노동이었다. 아주머니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래를 가지고 와 다듬잇돌 위에 펼쳐놓고, 나무 방망이로 리듬을 맞춰 두드렸다. 그냥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고 박자를 주고받으며, 마치 악기 연주를 하듯 정성스럽게 손질했다. 그 모습은 일이라는 느낌보다는 하나의 풍경이었고, 일상 속의 음악처럼 사람들의 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2. 다듬이질은 여성들만의 특별한 기술이었다다듬이질을 하려면 단순히 힘만 있다고 되는 ..

엿장수는 왜 북을 쳤을까?

1. 엿장수는 왜 항상 북을 두드렸을까?엿장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다. 아이들에게는 소리만 들어도 침이 고이던 그 북소리는, 단순한 판매 알림을 넘어서 거리 전체를 들썩이게 하던 일상의 알람이었다. 엿장수는 왜 북을 쳤을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요즘처럼 SNS나 전단지가 없던 시절, 엿장수는 자신이 도착했음을 북소리로 알려야 했다. 하지만 북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북의 박자와 리듬, 소리의 크기는 ‘기술’이었다. 엿장수마다 고유의 박자를 가지고 있었고, 단골 손님은 그 소리만 듣고도 “아, ○○ 엿장수가 왔구나” 하고 알아챘다. 북소리는 판매 알림이자, 브랜드이자, 지역사회를 잇는 리듬이었다.2. 엿은 단순한 간식이 아닌 삶의..

방앗간 주인의 기술, 기름 짜는 날의 풍경

1. 방앗간은 마을의 부엌이었다예전엔 어느 마을에나 하나쯤은 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은 단순히 떡을 찌는 곳, 기름을 짜는 기계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부엌이자, 사람들의 정을 나누는 장소였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방앗간은 분주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방앗간 예약을 하고, 쌀과 콩, 깨 같은 곡식을 자루째 들고 나왔다. 기름 짜는 날이면 특히 더 특별했다. 방앗간 주인은 깨나 참깨를 볶고 식힌 뒤, 돌림 기계에 넣어 천천히 눌러 기름을 짜냈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방앗간 안에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 퍼졌고, 동네 어르신들은 그 냄새만 맡아도 “아, 곧 명절이구나” 하고 느꼈다. 기름 냄새가 계절을 알려주던 시절, 방앗간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에 있었다.2. ..

옛날 이발사는 면도도 해줬다고?

1. 이발소는 단순히 머리만 자르는 곳이 아니었다지금의 이발소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염을 정리하는 ‘간단한 미용 서비스’로만 여겨지지만, 과거의 이발소는 훨씬 다양한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특히 1950~70년대까지만 해도 이발소는 남성들을 위한 종합 미용소에 가까웠다. 당시 이발사는 단순한 머리 자르기 기술자 그 이상이었다. 손님의 머리를 자르기 전,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턱 주변에 거품을 내서 면도를 해주는 것이 이발소의 기본 서비스였다. 지금처럼 전기면도기나 일회용 면도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 직접 면도를 받는다는 건 고급 서비스이자,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경험이었다. 이발소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맡기고, 따뜻한 물수건에 눈을 감은 채 면도를 받는 그 순간은 단순한 ‘미용’이 아닌, 하나의 일상 ..

사발장수의 하루, 그들은 어떤 물건을 팔았을까

1. 사발장수, 이름만큼 낯설어진 직업‘사발장수’라는 말은 요즘 세대에겐 매우 낯설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시골 장터나 마을 어귀에서 사발장수는 흔히 볼 수 있었다. 사발장수는 이름 그대로 사발이나 대접 같은 그릇을 들고 다니며 팔던 유랑 상인이었다. 그들은 손수레에 그릇을 싣고 마을을 누비거나, 머리에 사발이 가득 담긴 광주리를 이고 다니기도 했다. 흔히 사발장수는 사발 하나씩 팔던 장사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이 파는 물건은 사발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발을 포함해 다양한 생활용 식기, 놋그릇, 바가지, 유기, 양은 그릇, 심지어 작은 주방 기구까지도 함께 판매했다. 오늘날의 다이소와 같은 생활용품점을 등에 지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 이동하며 장사를 하던 그들의 방..

땜장이란 어떤 직업이었을까? 왜 사라졌을까?

1. 땜장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땜장이는 오래전부터 우리 마을 곳곳을 누비던 생활 밀착형 수리 전문가였다. 그들은 금속으로 된 냄비나 주전자, 양은그릇처럼 금이 가거나 구멍이 난 물건들을 납이나 주석을 이용해 붙이고 메우는 일을 했다. 현대의 ‘용접공’과는 달리, 땜장이는 주로 생활 용품을 손수 수리하면서 집집마다 찾아다녔던 순회 수리공이었다. 땜장이의 손에는 언제나 무거운 도구함과 땜납, 작은 가스버너, 줄, 망치, 철사 같은 연장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마당 끝에 자리를 펴고, 부엌에서 고장 난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며 한 땀 한 땀 금을 메웠다. 누군가는 땜장이를 '그릇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만큼 땜장이의 일은 단순한 수리가 아닌, 물건을 되살리는 정..